출근길에 10분씩 읽었다. 회사란 곳이 욕망과 자아의 충돌의 현장 아닌가. 아침마다 이 책을 조금씩 읽고 정신 무장을 했다.
내면의 것이 아닌, 꾸며진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변하지 않는다. 노자가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발뒤꿈치를 들으면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보폭을 넓게 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 『노자 · 24장』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불편했다. 그저 이유 없는 습관일 수도 있겠으나, 키가 커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러한 사람도 더러 많이 봤다. 비슷하게 필요 이상 사용하는 영어와 과장된 발음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스스로에게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판단들이 가끔 스스로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내 중심을 잃지 않고 사람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강인함과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씻고 / 창랑의 물 흐리면 발을 씻으리!”
<정의>를 지나치게 좋아하면 자연스러운 도리에 어긋나기 쉽다. 이런 좋은 가치들을 자연스러운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수고롭게 되고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되게 만든다.
지나치게 관념에, 명분, 정의에 집착하지 말자. 불화를 일으키는 극단적인 정의는 지친다. 장자는 지나친 관념과 껍데기만 남은 학습된 지식과 명분을 경계했다. 것보기에 장자는 모든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지만, 가치를 찾아 나서길 포기하지 말라는 따듯한 말까지 건낸다. 항상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가. 판단하지 말고 변화에 집중하자.
갈무리
- 집착을 없애면 의식함이 사라지고 의식함이 사라지면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자전거를 오래 타다 보면 나와 자전거가 한몸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중에는 내 정신과 하나가 된다. 초보자가 그림을 그리면 붓이 의식되지만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붓은 물론 나도 잊어버린다.
- “평상심이 도이다. ‘평상심’이란 무엇을 억지로 하지 않고, 무엇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옳다 그르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소유하겠다 버리겠다 따지지 않는다. 길다 짧다거나 속되다 성스럽다 가리는 일도 없다. …… 그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물을 대하는 게 모두 도이다.” 『경덕전등록』
- 밝음을 알면서도 어둠으로 처하라. 어른의 삶을 알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처하라.
- 키가 작은 사람이 크게 보이려고 뒤꿈치를 들고 다니면 얼마 걷지 못한다. 빨리 걸으려고 보폭을 넓히면 몇 걸음 못 간다.
-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라 자연스러움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눈을 현란하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참된 아름다움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내면에서 우러나서 밖으로 피어난 것이다. 내면의 것이 아닌, 꾸며진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변하지 않는다. 노자가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발뒤꿈치를 들으면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보폭을 넓게 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 『노자 · 24장』14
-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심재를 못한 것은 제 마음속에 저 자신의 자아의식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군요. 이제는 제 마음속에 ‘나라는 것’도 없어져버렸습니다. 이제는 진정 마음을 비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한다. “이제 됐다.” 『장자 · 인간세』
- 질그릇을 상품으로 걸고 내기 활쏘기를 하면 잘 맞는다. 허리띠 장식을 걸고 내기 활쏘기를 하면 잘 안 맞는다. 그러나 황금을 걸고 내기 활쏘기를 하면 거의 안 맞는다. 실력은 같지만 외부 사물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밖의 것에 신경을 쓰다 보면 내면의 정신을 망치고 만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면 자기 기준으로 무엇을 만들려고 하고 그에 알맞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여긴다.
- 장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자연스러운 모습만 추구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성품도 있는 그대로 놓아둬야 한다. 바로잡겠다거나 올바르게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대칭이 아닌 소의 뿔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대칭이 되게 하려고 뒤트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름 등의 구분에 집착하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이다.
- ‘사랑’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자연스러운 사랑을 혼란케 하고, ‘정의’를 지나치게 좋아하면 자연스러운 도리에 어긋나기 쉽다. 이런 좋은 가치들을 자연스러운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수고롭게 되고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되게 만든다.
-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학습되는데, 학습된 것이 소화가 안 된 채 오래되면 껍질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진다. 장자는 이런 알맹이 없는 껍데기를 부정했다.
- ‘최선을 다한다’는 일이 무고한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욕망은 명분으로 포장되고, 명분은 언제나 지식으로 윤색된다.
- 시인 도연명은 옛글을 공부할 때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지나친 해석에 매달리진 않는다. 매번 마음에 깨닫는 바가 있으면 밥 먹는 것을 잃어버릴 뿐이다’44라면서 지나치게 문자에 매달리는 오류를 경계했다.
- 우리가 다르다거나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많은 개념이 사실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 노자와 장자의 일관된 관점이다.
- 그러므로 소인이 되지 말고 자기의 천성을 따르라. 군자가 되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라. 일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자연의 대도에 상응하라. 자기의 행위를 일관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정의를 지키려고 하지 마라. 자기의 참된 마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장자 · 도척』
- 지혜가 있는 사람은 분별의 기준을 꿰뚫고 본질을 직시한다는 점이다. 승리와 패배, 이익과 손해, 청렴과 부패, 선함과 악함 등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앞에 나타난 현상만으로 분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장자는 말한다. 목마른 자처럼 정의로 달려가는 자는 또 뜨거운 것에서 도망치듯이 정의를 버리게 마련이다. 『장자 · 열어구』
- 진정 커다란 그릇에 완성됨이란 없다. 완성됐다고 하면 이미 큰 그릇이 아니다. 무엇이 ‘되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비해 ‘아직 안 된 것’이다. 우리가 크다, 작다, 어떻다 하는 것은 결국 상대적인 것일 뿐이며, 진정한 실체는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와 표현하는 범주를 넘어선다는 의미다. 장자는 이를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 밖에서 들어와 자리 잡은 ‘관념’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 본연의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 장자의 첫 번째 지적은 외부로부터 들어와 자리 잡은 외래적 관념을 깨버리라는 것이다. 관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 진정한 깨끗함이란 깨끗하다 또는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리지 않는 일이다. 머릿속에 깨끗함이라는 개념조차 없어야 한다. 더러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이나 더러움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깨끗함이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지켜나가는 깨끗함이 아니라 스스로 깨끗한 것이다. 삶의 수많은 가치, 그것이 온전히 내면의 진정한 것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장자는 맑고 흐림, 좋음과 나쁨, 정의와 불의 등의 대립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대립적인 관점이란 대개 그렇게 ‘인식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 장자가 볼 때 ‘명분이란 본질의 껍데기’이며 실천을 위해 걸어놓은 깃발일 뿐이지 실천 그 자체는 아니다.
-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고통은 화살처럼 사람의 가슴에 박힌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뽑아내려고 발버둥치지만, 사실 고통의 화살이란 한 번 박히면 빼낼 방법이 없다. 치유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박힌 화살이 세월 속에 녹아서 내 몸의 일부가 된 채로 사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에는 이 보잘것없어 보이면서도 의미 가득한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구현할 책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