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3

심연과 침묵

하인리히 뷜, 『천사는 침묵했다』 를 읽고

벽에 석회가루를 청소하려 애쓰지만 다시 하얀 가루로 남는다. 지울 수 없는 잿빛이 자국으로 남는다.

한스 자신이 훔친 외투를 돌려주다 레기나를 만나 사랑을 한다. 레기나는 도둑질과 헌혈을 하며 삶을 이어가지만, 이 괴로움이 불어나서 영원할 것처럼 느낀다. 전쟁 속에서 죽은 자신의 아이가 부러울 지경이다.

피셔 박사는 나치 당원, 종교 가릴 것 없이 이용하며 자신을 배불리 하며 권태를 느낀다. 천사 대리석상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고통스러운 미소를 띨 뿐이다. 그 안에서 철저히 파괴되어 버린 사람들. 폐허 속에서도 빵을 먹기 위해 도시를 헤집고 다닌다. 어쩌면 내면 깊이 부패하고 풍족한 성당에 환멸을 느끼지만, 먹는다는 것 집요한 고역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주인공 한스를 성당에 서성이게 한다.

천사 동상은 이러한 심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 처럼 보인다. 분노보다는 무기력과 고통, 희망보다는 생존에 대한 흥분, 사랑보다는 밀려오는 피로감이 만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