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과잉

2025.06.15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떠나고 있다.

요즘 공허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그런 생각이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마음을 갉아먹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빠져 있었다. 그 생각이 입시를 버티는 힘이었고, 결국 명문대에 들어갔다. 노력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몸에 배었다. 성인이 된 뒤, 그런 정체성은 더 커졌다.

서른이 넘어 “대학교 입시만큼 정직한 성취는 없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세상은 단순한 정체성 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느낀다. 내 안에 없는 정체성을 정의하고, 분열하고, 공허함을 반복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당장 행동하지 않을 허영된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외면한다. 공허는 내 안의 여러 상을 나누고 상상하는 데서 온다. 사실 진짜도, 가짜도 없다. 나는 그냥 나인데, 그 안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려 하며 지친다.

자연이 있지만, 매일 고행이 기다리는 곳.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그냥 나를 감각적으로 조금 더 느끼겠지.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비대해진 정체성을 내려놓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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