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학교'라고 부르는가" 따위의 생각들. 건물이 학교도 아닐 것이고, 가르치는 공간 도 아니고,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생각보다 단어가 엄밀하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물고기를 분류하는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물고기들에게 이름을 붙여 의미를 찾는다. 어느 날 그는 이름을 붙이고 분류했던 모든 표본을 지진으로 잃게 된다. 그는 물고기의 이름을 지어주며 세상을 창조하려 했을까? 매번 살아가며 느끼는 무의미 속에어도 의미를 찾은 것인가? 절망하지 않고 덤덤히 나아가는 그의 초월적 행동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의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자체다.
"파괴되지 않는 것"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하는 그 질문.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낙관주의와는 전혀 무관해. 낙관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심오하고 자의식은 훨씬 덜하지. (....) 나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경이로운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 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물고기라는 범주, 그가 역경을 딛고 만들고자 하는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인간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모두에게 관념이라는 이갸기 거리가 필요하다. 마치 명료하지 않고 엄밀하지 않은 "학교"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무언가 말해주는 것이 있는 것 처럼. 존재하지 않을, 영원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인가. 학교는 없지만, 학교는 있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