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가치는 떨어진다
하노 벡, 우르반 바허, 마르코 헤르만, 『인플레이션』을 읽고
대학생 시절 양적 완화를 알게 되었다. 당시 연준위의 버냉키의 양적 완화 축소가 큰 이슈였다.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해서 시중에 돈의 유통량을 늘리는 행위다.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화폐가 닳아서 폐기되거나 실물 가치를 창출하는 만큼만 화폐를 찍어내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화폐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화폐가 계속해서 팽창함에 따라 실질적인 화폐의 구매력이 하락한다는 것을 알고는 내 주머니가 도둑맞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 책은 돈의 탕생과 함께 시작된 인플레이션의 역사를 다룬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플레이션의 역사는 다음 10가지 명제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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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그 자체로 신뢰다. 돈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화폐가 무너진다. 돈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도록 남용을 막는 것이 정치의 우선적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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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 붕괴하기 시작하는 초창기에는 국가나 통치자가 과도한 채무에 시달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과도한 채무가 생기면 국가나 통치자는 인플레이션을 이용해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러한 유혹은 언제나 존재한다. 인플레이션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예상하는 이유다. 돈과 통치자가 존재하는 한, 인플레이션은 사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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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거대한 면도칼 위를 달리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대개 인플레이션은 단기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킬 뿐이다. 소위 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인플레이션이 너무 낮아도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경제는 황폐해진다. 이것이 화폐 시스템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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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초 인플레이션이었고, 대게 초 인플레이션은 정치적 격동기에 발생했다. 일종의 정치적 인플레이션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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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파들도 인플레이션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다. 경제학파 내에서도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즈 학파와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고수하는 고전학파로 나뉜다. 케인즈학파는 인플레이션이 생산력을 방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고전학파는 돈은 실제 경제활동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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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량과 인플레이션율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상관관계는 장기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었고, 물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을지만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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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금융위기 발생과 통화 대량 투입 주기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통화량 급증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다음 위기를 예고한 신호탄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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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물가에만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 심지어는 금융자산에 이르기까지, 이 상승하는 자산 인플레이션도 동시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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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서민층, 빈곤층이다. 인플레이션은 부당하고 불공정한 세금과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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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가는 인플레이션을 조장해 부채를 없애려고 해 왔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의 종말이 예상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위의 10가지 명제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책에 잘 나와있다. 인플레이션 정책에 대한 배경과 효과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반복되는 인플레이션으로부터의 경제적 위기가 많았다. 경제 위기와 호황의 반복에서 스스로 최선의 선택을 하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