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한 생각들

2024.08.01
산티아고 순례길

정체성 과잉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떠나고 있다.

공허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들을 던진다. 중요한 질문이지만, 이런 정체성 과잉은 마음을 갉아 먹는다.내 안에 없는 정체성을 정의하고, 분열하고, 공허함을 반복한다. 허영된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외면한다.

자연이 있지만, 매일 고행이 기다리는 곳.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그냥 나를 감각적으로 조금 더 느끼겠지.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비대해진 정체성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걱정이 짐이 될 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유튜브로 여러 순례자들의 후기를 봤다. 준비물이 계속 늘어났다. 순례길에는 30~40L 백팩을 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게 느껴졌다. 에코백만 들고 걷는 사람도 우산은 챙겼다. 나도 축축한 신발로 걷기는 싫었다. 우산을 시작으로 경량 패딩, 무릎 보호대 등 짐이 하나둘 늘었다.

나름 미니멀리즘을 지향해보고자 했다. 15L짜리 작은 가방에 짐을 싸려고 시도했다. 쉽지 않았다. 침낭을 넣는 순간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30~40L 배낭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여행 말고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여행 이후에도 쓸 수 있는 22L짜리 아크테릭스 가방을 샀다. 평소 사고 싶었지만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가방이다. 이제 새로산 가방 하나에 짐을 싸야 했다. 과정에서 경량 패딩은 포기했다. 비를 위한 장비들은 사치였다. 바디워시는 샴푸로 대체할 수 있을지, 양말은 몇 켤레가 적당할지 극단적인 고민이 이어졌다. 어찌저찌 새 가방에 짐을 다 쌌다.

순례길을 걷다 보니 나보다 짐이 적은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스스로 미니멀리스트가 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배낭을 보며 놀랐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걱정으로 저 짐을 들고 왔을까. 적은 짐이 능사는 아니었다. 불편함이 있었다. 속옷 없이 반바지를 입거나, 맨몸 위에 바람막이만 걸치거나, 젖은 신발로 걷는 날도 있었다. 가다 멈추고 시냇물에 빨래를 하고 옷을 말리기도 했다.

산티아고에서는 나의 걱정이 곧바로 가방의 무게가 된다. 물건이 있어서 혹은 없어서 힘들 때마다 짐에 대해 생각했다. 가져오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가져왔어야 하는 것, 이제는 버려야 할 것들을 말이다. 점점 극단적으로 걱정을 내려놨다. 물도 무거워 챙기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목이 마르면 참고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면 되니까. 비가 오면 맞으면 된다. 젖은 옷과 신발로도 걸을 수 있다. 말리면 된다. 걱정을 더니 짐이 덜어졌고, 몸이 가벼워 걷기 수월했다.

잘 하려고 하는 걱정이 오히려 짐이 되지는 않을까

P에서 J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간다. 인천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15시간 비행기를 탔다. 레온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순례길을 시작할 예정이다. 마드리드에서 고속철도로 3시간 즈음 있는 도시다. 레온에서 산티아고 성당까지는 걸어서 15일 정도가 소요된다.

오후 6시에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휴대폰 배터리가 얼마 없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7시 30분에 출발하는 레온행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가야 한다.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공항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든 공항에서 기차역까지는 쉽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큰 착오였다.

공항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스페인 지하철은 우리나라 보다 복잡했다. 환승도 많이 했어야 했다. 특히 발권이 쉽지 않았다. 중간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금방 버스를 잡아 탔다. 버스 안에서 숨 고르고 안에서 지도를 켰다. 버스를 거꾸로 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퇴근길 강남 같았다. 7시 30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휴대폰이 배터리가 없어 꺼지기 직전이었다. 기차역까지 어떻게 갈지 이미지를 캡처를 시작했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휴대폰을 비행기모드로 변경했다. 어찌어찌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차역 안은 매우 복잡했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이 꺼졌다. 겨우겨우 버거킹을 찾아 배터리를 충전했다. 버거킹에서 콜라 하나 시켰다. 크게 한 모금 마셨더니 위가 확 놀라 배가 쓰렸다. 장시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다가 공복상태였기 때문에 속이 놀란 것이다.

버거킹에서 배터리를 충전하고 나서 내가 타야 할 고속철 승강장을 20분 남겨두고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권 기계로 표를 끊기가 어려웠다. 발권기에 비친 스페인어에 구글번역기 카메라를 비췄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티켓을 사기 위해 창구에 갔다. 번호표를 뽑았으나 수십 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이렇게 마드리드에서 하루 자고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발권기로 다시 돌아가 눌러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눌러보았다. 5번 이상의 도전 끝에 10여분을 남기고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표를 들고 부랴부랴 뛰었다. 뛰다 보니 공항처럼 짐검사를 해야 했다. 줄을 서야 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결국 간신히 승강장에 도착하여 고속철을 탔다.

출발 전에는 계획이 없는 여행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유를 갖고 하나하나 모험하는 여행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의 MBTI는 ENTP이다. 살면서 점점 P에서 J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데, 이번 여행에서 더더 느꼈다. P는 강인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크게 느꼈다.

이날의 경험은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디를 갈 때 그곳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미리 걱정하고 준비했다.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해서, 순례자 숙소가 다 차면 어쩌지?" 하는 걱정 말이다.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는 스페인어의 부엔 (buen: 좋은)과 까미노 (camino: 길)라는 뜻이 합쳐진 인삿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순례자들에게 하는 인사다. 며칠 걷다 보면 "부엔 까미노"가 입에 붙는다.

첫날. 누가 봐도 순례자인 나의 차림. 지나가는 사람이 "부엔까미노"라고 인사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부.. 부엔 까미노"라고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종종 1~2 시간 만에 사람을 처음 보기도 했다. "부엔까미노!" 인사가 절로 나왔다. 오후에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걷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럴 때 서로 응원차 하는 인사도 꽤나 힘이 되었다. 응원 인사가 금방 익숙해졌다.

순례길 내내 나는 친구가 없었다. 여기서의 친구라고 하면, 5분 이상 대화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마도 내가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잘 나누지 못해서 일 것이다. 인사를 건네지 않고, 에어팟을 끼고 걷는 나다. 2000년대 힙합 노래와 발라드를 들었다.

순례길을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조차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출발했으나, 여행 전 상상만큼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다. 사람이 많을 때에도, 서로가 인사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연에는 만남이 필요하고, 만남에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에는 가벼운 인사가 필요하다. 나는 그 가벼운 시작도 선뜻 잘 하지 못했다.

서른이 넘어서 인사성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다르게 살갑게 인사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빛나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알아갔을까. 그리고 한국에서도 더러 몇몇의 인사성 좋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인사의 따듯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인사를 잘 못하는 사람이구나"

zumo de naranja

"zumo de naranja, please"

하루 종일 걷다 보면 힘이 빠진다. 살기 위해 오렌지주스를 물처럼 들이켰다. 정확하고 빠른 주문을 위해, 오렌지주스 만큼은 스페인어를 외웠다. "zumo de naranja"—주모 데 나랑하. 하루 세 번쯤은 외쳤다. "그라시아스", "부엔까미노"보다 더 자주 입에 올린 말이었다. 혈당 스파이크가 걱정돼 잘 마시지 않던 오렌지주스다. 순례길에서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의 생명이 입안에 퍼지는 기분이다.

이름을 알면 애정이 생긴다. 아니, 애정이 있어야 이름을 알고 싶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순례길을 걸으며 하루에도 여러 마을을 지났다. 어느 순간부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나고 나면 마을이 마을로만 남았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고 답했지만, 마을 이름을 말하지 못해 말문이 막히곤 했다.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음악을 들었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노래들도 다시 꺼냈다. 특히 'GOD의 길'을 무수히 들었다. 그런데 문득 듣고 싶은 노래가 하나 떠올랐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리듬과 앨범 커버의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한참을 검색하다 결국 스트리밍 기록을 뒤져 찾았다. Roland Faunte.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노래를 틀었다.

장소, 사람, 물건.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존재가 선명해진다. 내가 스페인어와 영어를 더 잘했다면, 세상은 훨씬 다채롭게 느껴졌을까. 어쩌면 내가 경험한 세계는 너무 좁은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이름이 너무 적다.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

행복해지려면 행복하면 된다.

와이너리 투어 가이드가 퀴즈를 냈다. 이 농장의 가장 비싼 와인이 얼마일 것 같냐고 묻자, 누군가 "맛을 봐야 알겠다" 하고 농담을 던졌다. 포르투에서 본 전통 공연 파두도 기억에 남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순례길에서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느 날 숙소에서 열 명 남짓 함께 식사를 했는데, 한 독일인이 눈에 띄었다. 그는 미국 횡단 여행을 꿈꾸며 각국의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유쾌했다. 포르투에서는 파두라는 전통 공연을 봤다. 눈치보지 않고 흠뻑 즐거워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행복을 느끼고 즐길 줄 아는 사람, 그가 행복한 사람이다.

걸어가면 되지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포르투에서 며칠 쉬었다. 도시는 대부분 걸어서 다녔다. 트램 같은 지상철로 2~3정거장 거리는 무조건 걸었다. 만약 그냥 여행으로 이 도시를 왔다면 대중교통을 훨씬 자주 이용했을 것이다.

걷다 보니 도시가 새롭게 다가왔다. 대중교통을 잘못 탈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혹여나 걷다 길을 잘못 들어도 작은 모험이 된다. 길은 결국 이어져 있다는 마음으로 걷는다. 예상치 못한 장소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디든 걸어갈 수 있다는 여유가 있었다.

산티아고의 고행 덕분에 마음이 단단해진 듯하다. "걸어가면 되지"라는 태도가 여행 방식을 바꾸었고, 도시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숙소에서 낮잠을 자다 도루강의 일몰을 놓칠 뻔했다. 서둘러 전철을 탔다. 걸어서 30분이던 거리를 전철로 5분 만에 도착했다. 그 순간 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지친 몸을 빠르게 나르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싣는, 익숙한 효율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걸어가면 되지"라는 담담한 마음이, 서울에서도 종종 떠오를 것 같다.

all or nothing

All or Nothing – 전부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한국인들은 순례길에서 버스나 택시 이용을 극도로 꺼린다. 이해가 된다. 한국인은 무언가에 대해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올림픽 은메달, 동메달에도 아쉬움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꽤나 있으니.

나의 도착은 아쉬웠다. 길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기보다, 걷지 못하고 버스나 택시를 탄 날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때 더 걸었다면, 더 의미 있었을까?" 애초에 계획한 이동이었음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2주 휴가 안에 전 구간을 걷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일부 구간은 버스나 택시로 건너뛰기로 미리 정했었다.

조바심과 불행은 이런 기계적인 비교에서 온다. 누군가는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800km를 걸어와 축제처럼 도착을 맞는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자극적으로 남과 비교하고, 사소한 것도 애정 어린 눈으로 보지 못하니, 전부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되는 건 아닐까. 비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오고 싶다, 산티아고에. 이번엔 800km를 걸어 도착하는 그 코스로.

어색한 서울

집에 들어올 때 부터 나의 방의 냄새부터 낯설다. 별로 좋지 않은 쿰쿰한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청소를 더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20L 도 가방을 들고 했다. 살아가는데 생각보다는 필요한게 적다고 느꼈다. 서울의 한강도 매우 이뻤다. 왜 평소에 일상을 아름답게 보지 못했을까. 서울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하루 10-15km 를 걸었다. 차로 다니던 순례길, 포르투 처럼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 차로 20분 걸리는 올림픽공원까지 걸어볼 생각을 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일상이 어색해진다. 많은 것들을 새롭게 느끼게 한다.

왜 걸어야 할까

왜 걸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생각보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걷기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