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mo de naranja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기억한 이름
"zumo de naranja, please"
하루 종일 걷다 보면 힘이 빠진다. 살기 위해 오렌지주스를 물처럼 들이켰다. 정확하고 빠른 주문을 위해, 오렌지주스 만큼은 스페인어를 외웠다. “zumo de naranja”—주모 데 나랑하. 하루 세 번쯤은 외쳤다. “그라시아스”, “부엔까미노”보다 더 자주 입에 올린 말이었다. 혈당 스파이크가 걱정돼 잘 마시지 않던 오렌지주스다. 순례길에서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의 생명이 입안에 퍼지는 기분이다.
이름을 알면 애정이 생긴다. 아니, 애정이 있어야 이름을 알고 싶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순례길을 걸으며 하루에도 여러 마을을 지났다. 어느 순간부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나고 나면 마을이 마을로만 남았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고 답했지만, 마을 이름을 말하지 못해 말문이 막히곤 했다.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음악을 들었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노래들도 다시 꺼냈다. 특히 ‘GOD의 길’을 무수히 들었다. 그런데 문득 듣고 싶은 노래가 하나 떠올랐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리듬과 앨범 커버의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한참을 검색하다 결국 스트리밍 기록을 뒤져 찾았다. Roland Faunte.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노래를 틀었다.
장소, 사람, 물건.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존재가 선명해진다. 내가 스페인어와 영어를 더 잘했다면, 세상은 훨씬 다채롭게 느껴졌을까. 어쩌면 내가 경험한 세계는 너무 좁은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이름이 너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