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백조는 흰 새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경험에 기반한 신념이었다. 이후 검은 백조가 나타났다. 더이상 백조는 흰 새가 아니게 되었다. 이 사례는 경험에 기반한 지식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보여준다. 기대 영역의 밖의 사건들, 극단값을 통계에서는 '블랙스완(black swan)'이라고 한다. 저자는 확증에 대해서는 회의주의적이다. 오히려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회의주의적이지 않다.
현상의 접근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특이한 것을 배제하고 '정상적인 것'에 주목하는 법이다. 두 번째는 극단적인 사례, 특히 검은 백조처럼 누적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에 먼저 주목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정상적인 것', 특히 정규분포를 나타내는 종모양의 곡선을 전제로 추론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정규분포의 문제점은 우리가 마치 불확실성을 길들이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은 이해력을 늘려주긴 하지만 그것의 한계가 분명하다. 그는 검은 백조가 없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 따위의 맹목성을 비판한다.
지금의 세상은 '규모 가변적' 인 현상들로 가득하다. 저자는 규모 가변적인 것과 규모 불변적인 것을 구분하며 규모 가변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체 인구 중에서 1000명을 무작위로 뽑아 운동장에 나열한다고 하자. 아무리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을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집단의 '체중'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나아가 만약 표본이 크다면 어떠한 단일 사례가 전체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운동장에 모인 1000명의 수입을 바탕으로 이 표본의 특성을 파악해보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약 빌 게이츠를 이 표본에 넣었다고 하면, 이 집단의 재산의 평균은 아마 빌 게이츠의 수입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규모 가변적'이라고 한다. 지금 세상은 생각보다 규모 가변적이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사건들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세상은 생각보다 점진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검은 백조에 의해 '비약'한다. 검은 백조의 역학으로 인해 세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책을 읽어나가며 규모 가변적인 특성을 갖는 극단의 사회에서, 불확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오히려 매우 합리적이라 느꼈다. 맹목적 확신의 경계 그리고 극단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은 흥미로웠다. 맹목적으로 '무엇을 안다'라고 말하는 헛똑똑이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바보가 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적당히 논리로 보수적이거나 공격적인 게 아니라, 때로는 초보수적이거나 초공격적일 필요가 있다. 검은 백조가 출현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니까 말이다.
ps. 이 책을 3번 읽었는데, 오히려 내가 이 책을 빌어 '안다'에 대해 맹목적으로 조소를 던지고 있었지 않나 싶다. 저자도 '안다'는 것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방법을 아는 것(know-how)'와 '무엇을 아는 것(know-what)'의 차이도 언급한다. 수술은 그 방법을 아는 의사에게 맡겨야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55 역사는 기어가지 않는다, 비약한다 (...) 인간의 마음은 그야말로 탁월한 '설명 기계'라는 생각을 강하게 굳히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고 갖가지 현상을 풀이해 낼 수 있는 반면에 '예견 불가능성'은 일절 용납하지 못한다.
55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인 19세기 말의 오페라 가수였던 자코모의 운명을 생각해 보자. 자코모가 자신의 목소리를 그 지역 밖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듯이, 유명 가수들도 자신들의 구역 바깥으로 목소리를 내보냄으로써 지방의 토착 가수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아직 노래를 저장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자코모는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마치 이발사가 직접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듯이 언제나 현장에 가서 직접 노래를 불러야 했다. 자코모의 시절에도 파이가 불평등하게 분배되긴 했지만, 참을만한 정도였다. 사람들의 체구 차이 정도의 불평등이라고나 할까. 파이는 조각조각 나뉘어서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유명 가수들은 청중이 많은 만큼 조금 더 큰 조각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불평등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참을 만했다. 아직 규모 가변성이 없던 시절이어서 청중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해서는 두 번 노래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녹음의 효과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엄청난 불평등을 초래한 발명이었다. 공연을 재생하고 반복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이제 내가 러시아의 시골 망명 피아니스트의 연주 대신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라흐마노니프의 서곡을 컴퓨터 배경음악으로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이제 시골 피아니스트들은 최저 임금에 허덕이며 별 재능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죽은 호로비츠가 살아있는 피아니스트들의 밥줄을 빼앗은 셈이다.
평범한 왕국이라면, 표본에 커 짐에 따라 어떤 단일한 사례가 전체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극단의 왕국에서는 불평등이 극심해서 하나의 관측값이 불균형한 비율로 전체에 충격을 가한다.
98 칠면조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는 믿음의 수정을 강요받는다.
115 "나는 보수주의자들이 모두 멍청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멍청한 사람들이 대부분 보수주의자라고 말했을 뿐이다." 존 스튜어드 밀이 항변하며 했던 말이다. 이 문제는 고질적인 것이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노력이 언제나 성공의 열쇠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분이 성공의 비결은 언제나 노력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포퍼의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는 세계의 근본적이고 철저하고 치유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측'을 다룬 장을 위해 보류해두겠다.
125 조지 소로스는 투자를 할 때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최초의 가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확신이며, 구태여 자신의 에고를 북돋는 신호를 찾으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다.
128 현대사회는 한마디로 극단의 왕국이다. 그곳은 희귀한, 아주 희귀한 사건들이 지배하는 세계다. 수천, 아니 수백만 일 동안 흰 백조만 보이다가 다음 날 느닷없이 검은 백조가 출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지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133 앞 장에서 귀납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우리의 정보 집합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추론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우리는 보이는 것, 즉 우리의 정보 집합 안에 존재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왜곡들을 검토해 볼 것이다.
140 우리는 영장류 가운데 인간 종의 성원으로 규칙에 대한 허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어진 문제의 차원을 축소시켜 그것들을 우리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아니, 안타깝지만 욱여넣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정보가 무작위적일수록 차원이 더 커지며, 따라서 요약하기가 더 어려워진 자. 거꾸로, 요약할수록 더 질서 정연해지고 무작위성은 감소한다. 말하자면, 단순화를 강요하는 바로 그 조건이 서계를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 검은 백조는 단순화 작업에서 버려지는 부분이다.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 이 문장을 다음 문장과 비교해 보라. "왕이 죽었다. 그러자 왕비가 슬픔에 빠져 죽었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에 몇 가지 요소를 더했는데도 전체의 차원은 경감되었다. 두 번째 문장은 전달이 더 잘되고, 기억하기도 더 쉽다. 두 개의 정보가 하나의 정보로 통합되었다. 기억하기가 쉬어진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도 쉽다. 말하자면 패키지로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 짓기의 정의이자 기능이다.
무작위성이 지배하는 직업이 종사하는 사람은 사후 결과를 기준으로 과거의 행동을 평가하는 소모적인 굴레에 얽매이기 쉽다. 일기를 쓰는 일 따위는 이런 분야에서 최소한의 출발점이 된다.
내 이야기의 결론은, 우리가 검은 백조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스템, 즉 이야기 짓기, 직감, 감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확인 편향의 오류나 이야기 짓기의 오류와 함께 말 없는 증거의 출현은 검은 백조 현상의 역할과 중요성을 왜곡한다. 말 없는 증거의 출현은 검은 백조 현상의 역할과 중요성을 왜곡한다. 말 없는 증거는( 예컨대 문학 작품의 성공에서처럼) 지나친 과대평가나 다른 요인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데 영항을 미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지각 체계는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것이나 감정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표피적인 것에 매달리는 존재로 길들여져서,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고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는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말 없는 증거와 이중의 싸움을 벌이는 셈이다.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덧붙여, 모든 추상적 개념의 어머니, 즉 확률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 천박한 존재임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더 잘 이해해 보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땅굴 파기'를 멈추는 일이다.
'상자 속의'것을 열어 보지 않고도 예견하는 플라톤적 사고, 즉 (사리에 맞지 않는) 법칙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수치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닻을 내려 버림으로써'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덜려고 한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 인간답다는 것에는 자기 일에 지적으로 어느 정도 자만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자. 이런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말라. 언제나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애쓰지도 말라. 자기 견해를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예견을 피하지도 말라. 이제까지 내가 늘어놓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바보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위험관리 기법'이란 것도 검은 백조 때문에 결함이 있음을 알았다면, 우리의 전략은 적당히 공격적이거나 적당히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보수적이거나 초공격적일 필요가 있다.
지엽적 정확성을 추구하지 말라. 더 간단히 말한다면, 시야를 넓혀라. (...) 마찬가지로 검은 백조를 너무 세밀하게 예측하려 하지 말라. 예측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타격을 입기 쉽기 때문이다. (...) 사태의 예견이 아니라 대비에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인간은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파악할 수 없어도 그 사건의 결과를 분명히 그려 낼 수는 있다. 예 켠대 지진의 발생 확률은 알 수 없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일어날 경우 어떤 결과가 생겨나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의 확률을 계산하는 것보다는 그 결과에 집중함으로써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불확실성에 대한 중심적인 개념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이에 기반하고 있다.